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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발망(Balmain), 모던 엘레강스에서 프렌치 시크룩으로

by Savoir Faire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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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in 2011 S/S Collection

피에르 발망에 관하여

피에르 발망(Pierre Balmain)1914년 프랑스 사부아(Savoie, Savoy, 사보이)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들은 부티크를 운영해, 발망은 어린 시절부터 옷감과 드레스를 가지고 놀며, 쿠튀리에(Couturier, 고급 여성복을 만드는 프랑스의 디지이너)의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군의관이 되길 바랬던 어머니의 반대를 잠재우기 위해 파리의 미술 대학 에콜 데 보자르 국립 미술학교(École des Beaux-Arts)에서 건축 공부를 하겠다며 파리로 상경하였습니다. 건축학교를 재학하던 중 패션 드로잉을 지속하며,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이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유명 디자이너 에드워드 몰리뉴(Edward Molyneux) 밑에서 일하게 되며 패션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 몰리뉴의 부티크에서 일한 뒤, 1939년 당시 파리 의상 조합 협회장이었던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과 일하게 되었으나, 를롱과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발망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어 군 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세계대전 당시 를롱은 나치가 꾸띄르 조직을 독일 베를린으로 이전하려고 하였을 때 저항하여 패션의 도시 파리의 명맥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 제대 후 롤롱과 다시 근무하며,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과 함께 컬렉션의 책임자로 임명되며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이후 디올과 발망은 함께 쿠틔르를 오픈하자고 약속하였지만, 발망이 1945년 자신의 하우스를 오픈하며 두 사람의 행보는 갈리게 되었습니다.

 

피에르 발망 브랜드 론칭

1952년부터 5년간 발망은 졸리 마담(Jolie Madame)이라는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가늘게 조인 허리 라인이 강조된 이브닝드레스로 지금의 발망의 시그니쳐 패션 스타일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졸리(Jolie)예쁜이라는 의미로, 졸리 마담은 예쁜 여성을 의미했습니다. 세계 대전으로 피폐되어 있는 상황에서 패션을 선도하기가 쉽지 않았고, 금욕이 당연시되는 분위기 속의 종전 기념 컬렉션에서 발망은 새로운 실루엣의 변화가 시도되었습니다. 발망은 다양한 종류의 퍼(Fur)를 매치하고, 모자, 긴 장갑 등의 액세서리를 즐겨 매치하여 고급스러움을 더했습니다. 실루엣에 맞는 시폰 소재의 드레스와 고급 프렌치를 사용한 그의 컬렉션은 화려하지만 정제되어 있는 엘레강스함을 보여주었습니다. 1950년대 크리스찬 디올, 발렌시아가와 함께 발망은 모더니즘 엘레강스 프랑스 3대 디자이너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발망은 자신의 하우스에서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비비언 리(Sophia Loren) 등 수많은 배우들의 의상을 디자인하며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브랜드의 혁신, 발망으로의 새로운 시작

1970년에는 기성복 라인을 확장하며 피에르 발망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였습니다. 12년간 활발하게 활동하던 발망은 198269세의 나이로 별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발망 브랜드는 급격하게 하향세로 진입하였고, 후속 디자이너들의 부진과 무분별한 라이선스로 저가 상품이 난립하게 되었습니다. 2005년 발망은 혁신을 위해 브랜드 이름을 피에르 발망에서 발망으로 줄이고, 파코라반의 수석 디자이너 크리스토프 데카르넹(Christophe Decarnin)을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로 영입하였습니다.

 

데카르넹은 2009S/S 컬렉션에서 선보인 ‘파워숄더 룩’(Power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컬렉션을 통해서 발망은 기존의 클래식하고 드레시한 디자인으로 사랑을 받던 역사 깊은 브랜드에서 새롭고 혁신적인 브랜드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셀러브리티의 사랑을 받으며 ‘발마니아(Balmania)’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바이커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선 절개 디자인의 ‘바이커 진’이 유명세를 탄 이후 2011년 데카르넹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발망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의 빈자리는 올리비에 루스테잉(Olivier Rousteing)이가 이어받아 발망 특유의 화려함과 시크함을 더했습니다. 루스테잉은 25세에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정되며 파리에서 가장 젊고, 최초의 흑인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유행하기 전부터 루스테잉은 인플루언서를 앰배서더로 세우며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였습니다. 10여 년 동안 발망을 이끌어온 루스테잉은 브랜드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통해 패션계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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